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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 김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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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계절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밝고 햇살이 비치는 느낌의 노란색 같다고 말한 배우 김규리가 인터뷰를 마치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커다란 부채를 집어 들었다. 커다란 부채에는 노란 바탕에 빨간 꽃을 피운 매화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여름이면 부채에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선물해요. 이건 어제 그린 거예요. 먼저 가장 큰 줄기를 그리고 균형을 맞춰가며 가지를 그려 넣죠. 매화꽃은 겨울이 지나고 봄으로 갈 때쯤 가장 먼저 피는 꽃이에요.” 김규리는 영화 <미인도>에서 신윤복을 연기하며 한국화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도 수묵화와 민화를 계속 그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쯤 해서 배우 일을 관두고 한국화 화가로 살아볼까 결심도 했지만 다시 배우의 길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다시봄이 찾아왔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촬영을 끝냈다. 이제 한숨 좀 돌리겠다. 아직 아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난 날 1시간 자고 칠곡에 있는 숲에 다녀왔다. 산림청 한국산림복지진흥원 홍보대사로 일하게 됐는데 숲 여행을 하며 그 숲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아마 10월쯤에 유튜브 영상과 책으로 나올 것 같다. 숲마다 특징이 모두 다른데, 어느숲에 가면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체험학습장이 있고, 어느 숲에가면 수목장이 있다. 수목장이 있는 곳은 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그옆에 캠핑장을 열어 주민들이 운영할 수 있게끔 했다. 여러 숲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프로젝트에 함께하게 됐다.


숲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겠다. 그러고 싶었다. 나무를 원체 좋아하기도 하고. 힘들 때면 소나무의 지혜를 배웠다. 한 번은 너무 답답해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 뭐라도 하고 싶어 청계산에 갔다. 그냥 막 올라갔다. 곧 정상에 오를 것 같은데 내가 어디쯤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고, 숨이 너무 차서 그만둘까 여러 번 고민하던 중에 산등성이에 있는 소나무를 보았다. 수백 년은 족히 그곳에서 살았을 법한 엄청 큰 소나무가 서 있었다. 긴 세월 동안 한자리에서 비바람을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소나무를 가만두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새겨놓은 글씨도 있었고 던져놓은 쓰레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나무는 오랜 세월을 버티며 살아온 거다. 나는 그래도 사람이니까 걸어 다닐 수 있고 숨도 쉬고 피해갈 수 있는데 소나무는 모진 시련을 덤덤히 겪어낸 거지. 그 생각을 하니 숙연해지더라. 소나무를 꼭 안아주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힘을 내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아주 기분좋게 내려왔지.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언니랑 말다툼을 크게 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무슨 일 때문에 싸웠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집을 나와 벤치에 누워버렸다. 한참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아주 키 크고 가는 소나무 두 그루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더라. 근데 소나무가 쭉 곧은 게 아니라 건물 사이에서 자라며 해를 보기 위해 기를 쓰느라 삐뚤어져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지도 못하고 해를 보기 위해 그렇게 애쓰고 있었던 거지. 문득 나는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고 하고 싶을 일을 성취할 수 있는데 소나무는 그렇지 않음에도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소나무들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왜 많은 나무 중에 유독 소나무에 마음이 더 가는 걸까? 소나무는 땅의 기운을 받는다더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나무가 돌산에 있는 소나무다. 나무가 돌이 가득한 땅속의 돌을 피해 뿌리를 뻗는다는 건데, 그런 소나무는 곧게 자라지 않고 구부러진다. 그런데 우리는 일자로 뻗은 소나무보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를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나. 정작 그 소나무는 엄청 힘들게 자랄 텐데. 그러다 문득 나는 내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누군가 나의 인생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산림청 홍보대사도 사심으로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 같고, 이 좋은 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기도 해서.


요즘 라디오 DJ로도 활동하고 있다. 산림청 홍보대사도 그렇고 EBS 국제다큐영화제 사회도 보게 됐다. 연기 외의 활동 영역이 다양한데, 폭넓게 활동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욕심보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연기하는 게 내 직업이긴 하지만 배우라고 해서 1년 내내 연기만 하며 살 수 없지 않나.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환기하고 단련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내가 사랑이 넘쳐야 악역을 맡더라도 사람들에게 내 연기의 진심이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보고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경험을 많이 쌓고 공부도 많이 해야지.


어떤 삶을 살지 오래전부터 정해둔 건가? 연기를 시작하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릴 때는 사람들이 나더러 욕심이 많다고 하면 듣기 싫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욕심이 있었다. 연기를 잘하고 싶은 욕심. 스타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자꾸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벼랑 끝에서는 간절한 마음이 나오지 않나. 절박하게 연기했다. 나 자신은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는 내 연기가 더 잘 가닿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보니 오히려 한계가 느껴지고 피폐해졌다. 살아남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게 된 것 같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산에 가고 봉사활동을 하고.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했다. 촬영 마지막 날 어떤 감정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막상 마지막 촬영을 하니까 많이 아쉬웠다. 무엇보다 스태프와 동료들 보러 가는 재미로 촬영장에 갔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으니까. <60일, 지정생존자>는 올해 1월 촬영을 시작해 8월에 끝났다. 드라마의 첫 촬영과 마지막 촬영 일정을 같이했다. 맨 먼저 들어가서 맨 마지막에 나온 거지. 이번 작품은 배우들 간의 합이 워낙 좋았다. 팀워크가 좋아서 시간 맞춰 함께 드라마도 보곤 했는데 아쉽게도 나는 함께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9시에 라디오 생방송이 있어서 밤 11시에는 잠을 자야 해서. 8시 30분까지는  방송국에 도착해야 한다.


아침 일정이 회사원에 버금가는 루틴이다. 목적이 있으면 움직이기가 편하더라. 나는 원래 저녁형 인간이었다. 저녁보다도 더 늦은 밤, 새벽에 가까운 밤. 그 시간에 사색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아침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후 깨어 있는 시간이 확 바뀌었다. 생활의 중심이 아침으로 간 거지. 이제 웬만하면 저녁 7시 이후에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 많이 늦으면 8시. 그동안 나는 밤을 좋아하고 그 시간에 사색하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괴롭히는 시간이었더라. 나는 감성적이어서 사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색이 너무 깊어지면 괴로웠다. 아침형 인간이 된 후에는 햇볕아래 나쁜 바이러스들이 사라지고, 습기가 싹 가시는 것처럼 훨씬 밝고 건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말을 배웠다.


이제 와서 말을 배웠다는 건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하지 마, 말하지 마, 움직이지 마, 조용히 있어,때리면 맞아, 맞아도 아프다고 하지 마.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입을 다물었는데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익숙해졌나 보다.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1시간 동안 말을 해야 하는데, 말 한 마디 꺼내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해서 바뀌는 게 아니라 청취자 때문에 내게 변화가 일어나더라. 나는 계속 공격 당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공격하는 사람이 한 명 있으면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더라. 라디오를 하면서 내게 힘내라 응원해주는 청취자들을 많이 만났다. 지금은 청취자들과 사이가 너무 돈독해졌다. 서로 응원해주는 사이다.


요즘의 삶이 유독 풍성해 보인다. 청취자들의 마음이 너무 따듯해서 말도 다시 배우고 일상성을 회복하는 중이다.


맞다. 업무로 맺은 관계보다 일상적인 관계가 더 큰 위로가 되어준다. 배우로 살고, 연기만 할 때는 뭔가 자꾸 부족한 것 같았다. 요즘에는 라디오 방송을 하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상성이 회복되고 있다. 나는 그냥 청취자들과 수다를 떨고 놀 뿐인데 얻는 게 너무 크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지나도 잃고 싶지 않은 인생의 주제가 있다면. 변치 않는 주제는 ‘나’다.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문제는 아주 어릴 때 풀었다.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더니 답이 나오더라. 나는 사랑을 전달하고 싶어서 태어난 것 같다. 그렇다고 대단히 많은 사람을 보듬겠다는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을 밝게 밝히고 싶었다. 내 주변을 밝히면 그 사람들이 자기 주변 사람을 밝히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며 그 좋은 기운으로 사랑을 퍼뜨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건강해야 하고. 인생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오면 올라간다고 하지 않나. 지난해가 내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일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직업을 바꿀 결심을 했었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한 일을 관두는 것이다 보니 결심하기 쉽지는 않았지. 그래도 사람은 때를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쿨하게 뒤돌아 서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려니, 할 일이 남았던 건지 갑자기 연기할 기회가 생겼다. 도망가는 것도 기회가 안 오더라.(웃음) 그래서 다시 즐겁게 남게 됐다. 그럼 다시 해볼까 하고 움직이는 중이다.


그래서 오늘의 김규리는 행복한가? 행복하다. 많은 걸 갖고 싶은게 아니라는 내 속마음을 알게 되어 더욱 그렇다. 이 삶을 즐기고 있어서 감사하다. 부피와 넓이를 키우기보다는 깊이 있고 심도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다행이다. 요즘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껏 완벽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완벽한 모습을 보면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부족한 모습을 보면 오히려 정이 가더라. 눈으로는 완벽한 것을 찾지만 심장은 부족한 모습을 봤을 때 움직이더라. 그냥 사람이 사람 같으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인생이 편해지더라. 전에는 내 주머니가 비어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빈 주머니를 보여줘도 아무렇지 않다. 아무것도 없으면 어떤가. 살기에 좋은 걸.

- 매체 : 마리끌레르
- 링크 : http://www.marieclairekorea.com/2019/08/celebrity/%eb%8b%a4%ec%8b%9c-%eb%b4%84-%ea%b9%80%ea%b7%9c%eb%a6%ac/?_N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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